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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향기-김건철 장로
[[제1692호]  2020년 6월  20일]

고향에 돌아가 고창교회 재건하고픈 꿈 여전해


고향을 떠나온 지 어느덧70… 지금도 눈에 선한 고향땅 그리고 어머니동생들


올해로 아흔하고도 두 해를 지나고 있는 김건철 장로. 105인 사건에 가담한 독립운동가였던 김응록 장로의 손자이자 한국전쟁으로 피난 내려와 충북에 예산교회를 세우고 평생 목회에 전념했던 김능백 목사의 장남이며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부인 엄영선 권사를 향한 사랑꾼그리고31녀의 아버지이자 일곱 손자손녀들의 할아버지다

김건철 장로가 남한으로 피난 내려온 지 올해로 딱70이곳에서 사업을 일구고 가정을 꾸리고 자녀손들과 수많은 인연들을 만들며 지나온 세월이 이제는 고향에서 보냈던 시간들보다 훨씬 더 길지만그럼에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한 고향땅을 향한 그리움은 조금도 가실 기미가 없다

평안남도 강서 고창리김 장로의 고향이다가만히 눈을 감으면 고향의 산천초목과 유유히 흐르던 대동강물이 눈앞에 선하다강물은 일 년 내내 넉넉히 흘렀고 수백 호가 넘는 집들이 모여 있던 마을은 평화롭고 풍요로웠다그리고 그 가운데 곱디고운 어머니가 계셨다

어머니와 제대로 작별인사를 할 겨를도 없이 헤어졌지. 1950년 어머니와 동생 네 명을 두고 아버지와 단 둘이 피난 내려왔어그때 내 나이가 스물두 살아버지는 쉰이셨어잠시 떨어져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벌써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거야당시 우리처럼 여자와 아이들은 이북에 남고 성인 남자들만 내려온 집이 많았어우리는 미군과 유엔군을 철석같이 믿고얼마 안 있으면 북진통일을 이루어 어머니와 동생들을 곧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지휴전이 되고 이렇게 긴 세월이 흐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지.” 

아버지 김능백 목사는 월남 후 제주도부산 등을 거쳐 충남 예산에 자리를 잡고 교회를 개척했다예배당이 없어 유치원을 빌려 예배드리고사택이 없어 움막집을 지어 생활하셨다.아버지는 일편단심 어머니 생각에 평생을 수절하시며밤에 이불을 잘 덮지 않고 주무셨는데 이북에서 고생하실 어머니 생각에 그러신 것이었다아버지는 고혈압과 당뇨가 있으셨음에도 약을 일체 복용하지 않으셨다하나님께서 주신 생만큼만 살고 하늘나라에 가시겠다는 뜻이셨다그리고65세에 돌아가셨다예산교회는 김능백 목사의 헌신적인 목회와 검소한 삶을 기리며 교회 마당에김능백 목사 기념비를 세웠다

오래 전 이북의 동생들로부터 편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그 편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앞을 가려나와 아버지를 떠나보낸 이후 어머니는 웃음을 잃으셨다고 해웃음이 많고 명랑한 분이셨는데 그런 분이 웃음을 잃으셨다니 얼마나 상심이 크셨으면 그렇게 되셨을까생사조차 알 수 없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염려와 걱정 때문에 하루도 맘 편히 잠을 이루지 못하셨을 거야어머니는 평소 내게교회 장로가 되라고그러면 소를 잡아 동네잔치를 해 주겠다고 하셨는데이렇게 장로로 교회를 섬긴지도 수십 년이 지났는데 어머니를 뵙지 못했으니 어머니 생각날 때마다 그 말씀이 떠올라 아쉬움이 크지.”

김 장로는 마흔 다섯에 장로가 됐는데한창 사업으로 바쁜 시기였기에 부담이 없지 않았음에도 어머니 생각에 주저 없이 교회를 섬겼다.  

김 장로는 비록 아버지와 함께 피난 내려왔으나 목회에 바쁜 아버지와 떨어져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스물두 살의 나이에 내려와 막노동좌판길에서 빵을 구워 파는 등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숱한 고생을 했다그러던 중 당시 비누공장이던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 직공으로 일을 시작하여몇 년 뒤에는 그의 성실성을 알아보았던 월성비누 사장의 권유로 동업해 동산유지공업주식회사를 세웠다동산유지공업주식회사는 코티비누벌꿀비누다이알 비누원더풀 가루세탁비누 등 고급 화장비누를 생산해 당시 국내 비누시장 가운데80%의 상권을 차지할 정도로 승승장구했다또 김 장로는30대 후반부터 건축 사업을 시작해 서울 곳곳에 주택을 지어나갔고 그의 사업은 끊임없이 번창했다

난 돈에 대해서 욕심이 없었어다만 열심히 살았지무일푼으로 내 한 몸 먹고 사는 것만도 힘겨웠던 시절이었기에 결혼하고 집 한 채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는데내가 이렇게 물질의 복을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지우리 아버지가65세에 돌아가셨는데 내가 아흔이 넘도록 장수하리라고도 기대하지 않았고다 하나님이 주신 거야할머니 할아버지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덕인 것 같아의인의 자손이 복을 받는다고 했는데 그래서인 거 같아.” 

김 장로는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며 자신이 거둔 성공과 받은 복을 교회뿐 아니라 교계 각종 연합기관과 사회단체들을 통해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데 아낌이 없었다

시각장애인들을 치료하고 돕는 재단법인 실로암안과병원(원장 김선태 목사아이센터와 학술원을 건축할 때 건축위원장을 맡아 각각5억 원과3억 원을 헌금했고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시각장애학생들을 대상으로 매년 두 차례 진행하는 장학사업에 매번 거액의 장학금을 지원한다또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많은 몽골인들의 복지와 선교를 위해 몽골문화진흥원 이사장을 맡아 다양한 후원을 이어왔으며교계에서는 남선교회서울연합회60주년 기념교회와 남선교회전국연합회70주년 기념교회 건축에도 일익을 감당했다북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며 실향민들이 모인 평안남도 중앙도민회와 서경회에서도 회장을 맡았고 지금까지 재단법인 평남장학회 장학금 등 여러 모양으로 큰 도움의 손길을 뻗치고 있다본보 사장발행인이사장 등을 통해 한국장로신문남선교회전국연과 전국장로회연합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해왔다.  

김 장로의 이같은 기부와 봉사 행적을 나라 안팎에서도 인정해 국민훈장과 목련장동백장또 몽골 북극성 대훈장몽골 국립대학 명예 교육학박사 학위 등을 받았으며지난해에는()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로부터 한경직목사 기념상도 수상했다

김건철 장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이웃)을 행복하게 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라고 강조했다그 자신이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매순간 노력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김 장로는 인생에서 인연의 중요성도 강조했는데그가 맺은 인연 중 누구보다 중요한 사람이 바로 부인 엄영선 권사다동산유지공업주식회사의 서울영업소 소장 시절거래처 직원이던 엄영선(서양화가권사와 만나2016년 회혼식을 치르고 지금까지 다정하게 해로하고 있다

낙천적인 삶을 통해 그는 항상 찬송과 노래하기를 즐겨한다나의 살던 고향을 부를 때면 고향생각어머니동생 생각에 잠시 눈시울을 붉힐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 22살에 이북에서 빈손으로 내려와 집도 없고 돈도 없고 가난하게 목회하시는 아버지밖에 가족도 없었는데그런데 좋은 배필을 만나니 결혼하고 싶어져서 우리 엄 권사와 결혼했지나는 결혼을 잘했다고 생각해하나님의 은혜지아무것도 없는 나였는데나보다 잘 사는 사람도 많고 잘난 사람도 많지만나는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김 장로의 마지막 소망은 역시 통일이다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고향땅 밟아보고 고향교회인 고창교회를 재건하는 것을 지금도 꿈꾼다.

/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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