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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50주년, 6‧25전 쟁 참전 70주년, 교회 출석 80년 그리고 미수(米壽)
[[제1690호]  2020년 6월  6일]

죽을 고비 숱하게 넘겨 지금까지 살려주신 주님께 감사” 

올해2020년은 내게 있어 특별히 자축할 해라고 생각하며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3’ ‘5’ ‘7’ ‘8’, 이 네 숫자 뒤에‘0’을 붙이면 각각 저에게는 특별한 기념일이 됩니다올해로 안양노회장에 취임(1990)한 지30주년이 되고김지영 권사와 결혼(1970)한 지50주년을 맞았으며, 6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1950)한 지70주년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안양제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1941)한 지 딱80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난517일 창립90주년 기념예배를 드린 안양제일교회에서 김우영 장로는 생존 교우 가운데 최장기 출석자다. 80년 전가정에서 혼자 신앙생활을 시작해 오늘에 이른 김 장로이기에 그 감격과 감사는 더욱 깊다

“1930년에 안양제일교회가 창립됐고이후10년쯤 뒤인1941년부터 교회에 나갔어요당시가 일제 시대였고그때까지만 해도 아주 자그마한 교회였지요어린 시절 친구들하고 같이 예배당에 가 찬송하고 기도하고 그랬던 기억이 나요저는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어요더구나 옛날엔 유교사상이 철저해서 교회에 나가지 말라고 야단하시고공부에 방해된다고 못 가게 하시고 그랬거든어려서 혼자 신앙 생활하는 것이 외롭고 고독했는데 오히려 신앙적으로는 도움이 되기도 했어요더 열심을 내게 되더라고요새벽예배에 나가려고 일부러 우리집 문간방에서 지냈어요.” 

부모님과 온가족이 함께 교회 생활을 하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웠지만 지금 돌아보니 자신을 향한 축복이었다고 김 장로는 고백했다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던 김 장로는 안양에서 유일하게 경복중학교에 입학했고 교회 어른들은 그런 김 장로를 기특해하며 사랑했다고

“625전쟁이 일어난 날이 주일날이었는데 교회 가는 길에 사이렌 소리가 막 울려요그때만 해도 삼팔선에서 간헐적으로 전투가 있었거든그런 전투 때문인가 보다 했는데 교회에 갔더니 당시 우리를 지도하셨던 박두진 장로님(시인)이 전쟁이 났다고 하셔어린 마음에 두근두근했던 기억이 납니다.” 

80년 동안 한 교회를 섬기며 두루 여러 역할을 맡아왔지만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은 성가대 지휘를26년 동안 했던 것과 건축위원장을 맡아 지금의 교회 건물을 헌당한 것건축위원장을 맡았을 땐 전국을 다니며 교회를 탐방했고 현재 교회 이름이 쓰인 휘호를 유명한 서예가 원곡 김기승 선생을 직접 찾아가 받아오기까지 했다

인터넷에서 사용하는 내 아이디(ID)가 모세예요하나님이 인도하신 모세의 삶은 기적 사건의 연속이잖습니까부끄럽지만 내가 감히 모세라는 아이디를 쓰는 이유는돌아보면 내 평생에도 기적과 같은 일이 많았어요. 70년 전625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해서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기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것이 기적입니다.” 

625한국전쟁은 김우영 장로가 중학교4학년이었을 때 발발했다당시 압록강까지 진격했다 후퇴한 미군이 안양에 주둔하고 있었다김 장로는 어린 나이였지만 학도병에 자원했다.

세 친구가 의기투합해서 학도병에 지원했는데 두 친구는 대대본부에 있어서 전투를 많이 안했어요그런데 나는 전투중대에 속해 최일선에서 전쟁만 했죠배낭 짊어지고 소총 들고 수류탄을 몸에 주렁주렁 달고 제천원주횡성홍천인제양구… 골짜기마다 옮겨 다니며 전투했던 기억이 역력해요절벽에서 풀뿌리를 잡고 있다가 떨어졌는데 소나무 위에 떨어져서 목숨을 건졌어요전투중대 대원들 일부는 포로로 잡히고 나머지는 다 죽었는데 나는 살아난 거예요또 탱크가 이동하면 그 앞에 보병을 세워요그 보병들은 완전 불쏘시개와 같은 거거든내가 그 보병으로탱크 앞2킬로미터 앞까지 가서 적진을 살펴 와야 했지요그렇게 위험한 상황 속에서 살아나온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6개월의 참전 끝에 김 장로는 학업을 다시 이어가기 위해 전장에서 나왔다의무 병력이 아닌 자원 학도병이기에 전역 절차도 없었다부대장이 써준 휴가증 하나를 들고 집으로 돌아와 복교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김 장로가 잊지 못하는 죽을 고비는 또 있었다경복고등학교엘 다니던 동생이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그 충격으로 김 장로도 위장병에 걸려 오랫동안 회복하지 못한 것이다

서울 시내 유명한 병원한의원이라는 곳은 다 다녀봤는데 백약이 무효야집에 약만 산더미처럼 쌓여갔어요부모님께선 나마저 잃을까 걱정이 크셨지.어느 날 신문을 보니 김천 용문산에서 치유집회를 한다는 광고가 났어요마음을 먹고 기차를 타고 그곳을 찾아가 일주일 동안 집회에 참석했지요옆 사람들은 방언도 하고 펄펄 뛰는데 나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요그러다 마지막 날온몸이 확 뜨거워지면서 병이 나았다는 느낌이 들더라고김천에서 서울로 올라오기 전 여관방에서 주는 밥을 한 그릇 다 비웠어요전에는 한술도 넘기지 못했던 내가.”

그때 기적으로 김 장로 부모님과 가족들은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다기적은 또 있었다바로 김지영 권사와 만나 백년가약을 맺게 된 사건이다

용문산 집회에 참석하고 있을 때 한 목사님 내외분을 만나게 됐는데 그분들이 아내를 소개하셨습니다내가 살아난 기도원에서 만난 목사님 내외분이 소개해 준 아내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배필이라고 믿고 있어요.”

김 장로는 아내에 대해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며맏이인 김 장로 아래로 여섯 동생들의 학업과 결혼까지 묵묵히 뒷바라지 했던 아내의 고생을 소개했다

금혼을 맞는 것이 나뿐은 아니고 행복하게 부부생활 하시는 분들이 주변에도 많이 있지만 시동생들을 그렇게 돌본 아내는 우리 김 권사밖에 없을 겁니다김 권사 덕분에 동생들이 대학 부총장에 치과의 등 다 잘 됐어요내가 또 성격이 유한 사람이 아닌데지금까지 우리 가정이 화목하게 잘 사는 것은 다 김 권사 덕분입니다.” 

김우영 장로는 남은 소망에 대해, “더 이상 소망을 품는 것은 욕심이라며 건강하고 평범한 생활을 누리고 있는 지금이 무척 행복하다고 말했다

돈을 많이 벌었다거나 큰 감투를 썼다거나 하는 건 없지만 정말 행복하게 살았다고 생각해요요즘 코로나19로 외출도 자유롭게 못하고 집에만 머물지만 그 덕에 예배하고 묵상하고 그런 생활을 여유롭게 할 수 있는 것도 감사합니다아마 외출하느라 바빴다면 올해가 저에게 이렇게 특별한 해인 줄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갔을 거예요이제는 평균수명이 늘어나 장수하는 분들도 많지만 저는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시간까지질적으로 보람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그래서 좋은 책도 열심히 찾아보고 묵상하고 그렇게 지냅니다하나님께 꾸중 듣지 않는 삶을 살다가 내일이라도 부르시면 감사한 마음으로 가고 싶습니다.” 


/한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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