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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곤 목사, '나는 민족사속에서 세례를 받았다'
[[제1160호]  2008년 12월  3일]
 

금주의 초대석

김준곤 목사, 한국대학생선교회 명예총재


"나는 민족사 속에서 세례를 받았다."


 

 “나는 민족사 속에서 세례를 받았다.”

 

김준곤 목사는 어제의 기도제목과 지금의 기도제목, 그리고 내일의 기도제목이 동일한 사람이다.

 

그의 생애는 강제징병을 당했던 일제시대와 사선을 수없이 넘어야 했던 6.25전쟁 시대, 그리고 미국 유학이 계기가 되어 평생 몸 바친 대학생 선교로 집약된다.

 

‘민족의 가슴마다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는 표어로 일평생 헌신 해온 대학생 선교를 통한 민족복음화의 여망은 오늘도 그의 젊은 가슴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그리고 그는 나는 민족사 앞에서 세례를 받았노라고 고백한다. 한국대학생선교회를 창시해 50년을 함께 한 김준곤 목사를 지난 11월27일 오전 10시 그의 부암동 집무실에서 만났다.

 

 

85세의 노구라 할까. 다소 여읜 듯 했지만 그래도 그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고 모습은 노신사다웠다. 50년동안 그는 CCC출신 대학생들을 한국교회에 보내 복음화에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이런일 저런 일 정리하고 있다고 서두를 꺼냈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내려야 했는데 다소 그렇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이제 서서히 지금까지 해왔던 일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소식(小食)을 해 온 습관 때문인지 건강엔 이상이 없구요”

 

김준곤 목사는 일제 시대 때 징병됐다가 일본군에게서 탈출하면서 사선에서 1년4개월간을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로 지냈다.

 

“잡히면 사형이었습니다.” 김준곤 목사는 작가 게오르규의 명언처럼 고독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괴로운 고통이라는 말을 실감한 듯 했다.

 

그러면서 그는 해방과 함께 6.25라는 또 한번의 절대절명의 시련과 고통을 당했다.

 

서울에서 국민학교 교사로 만나 결혼했던 아내와 함께 고향인 전남 신안군 지도면 증도를 찾았던 것이 화근이었다.

 

아내는 그 곳에서 학교교사이자 주일학교 교사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터졌고 그 마을은 99%가 공산당원이 되어 버렸다. 친척까지도 공산당원인 그 곳에서, 학교교사이자 주일학교 교사였던 아내와 머슴 두 명을 데리고 농사일을 하면서 유림회 회장이었던 아버지는 모두 공산당원들의 눈엣가시였다.

 

인민재판, 그 마을은 매일 피의 숙청이 이어졌고 마침내 아버지와 아내가 끌려갔다.

 

나중에 알아보니 모두 64명이 희생당했다고 했다. 먼저 아내가 무참히 순교당하고 아버지도 재 확인작업까지 받아가며 무참히 희생당했다. 2~3일후엔 김 목사가 끌려갔다.

 

개처럼 끌려간 김 목사는 바닷가 낭떠러지에서 묶인 채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 때 해안에 어떤 배가 지나가자 국군이 상륙한 줄 알고 다시 김 목사를 마을로 끌고 와서 누군가에게 죽여서 보고하라 하면서 그 마을을 떠났다.

 

“스무번 정도 죽을 고비를 넘겼나 봅니다” 그 후 얼마 못 있다가 다시 잡혀 공산당원 집에서 죽임을 당할 순간에 있었는데 그 공산당원 아내가 내 집에서는 사람 죽이지 말라고 소리쳐 그냥 놔두고 묶여두기까지 한 일도 있었다고 김 목사는 증언했다.

 

그 일을 겪으면서 김 목사는 “이러한 민족적 시련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내가 살아난다면 인생을 재설게해야 겠다”고 다짐했다.

 

전쟁이 끝나고 김 목사는 고려신학교에 입학해 신학공부를 하게 된다.  신학교 졸업 후 그는 태국 선교사 제의를 정중히 거절하고 잠깐 지금의 광주숭일중고등학교에서 최연소 교장을 지낸 뒤 1957년 풀러신학교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시험이 있었는데 코리아헤럴드 신문을 보면서 공부를 했죠. 7대1의 경쟁률을 이겨낼 수도 있었습니다. 집 한 채 값인 비행기표를 구하는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었습니다.”

 

유학시절을 통해서 김 목사는 일생의 전환기를 맞는다.  신학교에서 그는 CCC창립자인 빌 브라잇 박사를 만났다.(2003년 별세) 그들은 UCLA에서 CCC간사 10명이 전략적으로 운동선수와 학생 대표, 각 동아리 대표 등을 만나 그들이 예수를 믿고 헌신토록 했다.

 

캠퍼스 선교를 통한 선교에 큰 감명을 받은 김준곤 목사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1958년 11월2일 CCC창립에배를 드렸다.

 

“고려대, 서울공대, 수도여자사범대 등 5곳에서 전도를 하면서 고린도전서 4장 15절이 생각났습니다. 그렇게 2~3년이 되자 500명이 되고 그래서 오늘날 50년의 역사가 이뤄지게 된 것 같습니다.”

 

CCC를 거쳐간 제자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 홍정길, 하용조 목사와 옥한흠 이동원 손인웅 목사 등은 특히 기억에 남는 제자들이다.

 

“이름을 밝히기 곤란하지만 한 대형교회 목사님은 ”자기는 전도사를 하다 서울에 왔는데 병들어서 취직도 안됐고 어쩔 수 없이 CCC에서 모든 훈련을 받았고 그것이 오늘날의 내가 됐다고 증언한 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목회자는 적극적 긍정적 사고 보다도 우선돼야 할 것은 성서논리와 성서적 사고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 일과 같이 인간의 상식이나 생각으로는 배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하라는 명령은 혹 겨자씨 같은 작은 것에 불과할 지라도 불가능은 없으며 주님을 위해서 주님 뜻대로 하면 다 들어주신다는 생각이라는 것이다.

 

김 목사는 바로 CCC를 거쳐 간 제자들이 이러한 사고를 가지고 목회자의 길로 들어서 큰 성공목회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저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는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나는 탯줄, 힘줄, 숨줄, 핏줄과도 같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찬송은 ‘내 영혼이 은총입어’를 가장 즐겨부르고 있습니다.”

 

김 목사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전효심 사모(81)와 6.25때 살아남은 현재 미국 LA에 거주하는 장녀 김은희 권사가 있다. 또 2녀 신희 씨는 오래전 암으로 별세했고 3녀 윤희 씨는 횃불트리니티신학대 구약학교수로, 사위 박성민 씨는 CCC대표를 맡고 있다. 4녀 희수 씨는 영문번역일을, 사위는 현재 고아 입양사업을 하고 있다.

 

/이덕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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