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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건국대통령 이승만 장로 편 - 한반도 공산화를 막기 위해 불가피했던 ‘단독정부 수립’
[[제1541호]  2017년 3월  11일]

이승만은 북한 지역에 이미 공산 정권이 수립되어 민주개혁이란 명칭으로 사회주의화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을 직시했다. 그런 가운데 남한에서만 성공 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는 미소공동위원회의 합의만을 기다리며, 정부를 수립하지 않는 상태가 지속될 경우, 무서운 위험이 닥칠 것임은 자명(自明)했다. 아무 대책 없이 미국과 소련의 합의만을 기다리다 보면, 무정부적인 혼란은 가중되고 남한마저 공산화될 가능성은 충분했다. 조국이 소련의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승만은 정치적 고립을 자초하며 정치 생명을 무릅쓰고 단정론을 주장했다. 동시에 이승만은 남한 지역의 정치적 미해결 상태가 지속될 경우, 미국이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한국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서 희생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는 우리 민족 최초의 국제법 학자이고 수십 년간 망명정부의 수반으로 강대국들의 멸시를 받으며 외교 활동에 매진해온 이승만 박사만이 가질 수 있는 통찰력이었다. 미국은 1945년 마지막 3-4개월 동안에 다른 지역에 대한 정책을 관철하기 위해 한반도에 대한 소련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인상을 준다. 거칠게 표현하면, 한국은 넘기고 다른 곳을 받는 식이다.

여러 가지 사실을 종합해보면, 단독정부 수립론은 우리나라가 공산화되는 것도 아니고 강대국 간의 흥정과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도 안되며, 오직 자주독립국가로 세워져야 한다는 이승만의 필생의 신념이 탁월한 정세 판단을 통해서 드러난 승부수였다. 오늘날에도 이승만의 단정론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이는 곧 대한민국 건국에 대한 평가와 연결된다. 단정론이 현실화되어서 건국된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비판자들은 우리의 건국이 민족을 분단시킨 것처럼 비난한다. 그러나 수많은 증거가 입증하듯이 1945920일자 스탈린의 지령과 소련을 맹목적으로 추종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분단은 일찌감치 결정된 사건이었다. 단독정부의 수립 혹은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건국이 분단을 위해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건국의 지향점은 어디까지나 통일이었다. 궁극적으로 한반도 전체를 자유민족적으로 통일하기 위한 지리적 토대, 곧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대한민국의 건국은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추구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을 분단한 것이겠으나, 자유민주적 통일을 희구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민족 통일을 위한 필수적 조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단독정부의 수립과 건국의 중요성은 스탈린에 의해서도 입증된다. 중국에서 국민당을 밀어내고 승리를 거둔 중국 공산당은 제 2인자였던 류샤오치를 모스크바로 파송했다. 류사오치는 스탈린과의 회담에서 중국 공산당이 정부 수립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마오쩌둥은 다음 해, 195011일에 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한참 생각하던 스탈린은 자신은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어느 나라이든 공식적으로 출범한 정부가 없는 상태로 오래 끌 경우, 외국인의 간섭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스탈린은 류사오치에게 날짜를 앞당겨서 좀 더 일찍 정부를 수립할 것을 충고했다. 이에 따라 중화 인민공화국은 예정되어 있는 195011일보다 앞당겨 1949101일에 수립되었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대한민국의 수립은 시급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는 주권을 가진 정부가 없었기 때문에 40년간 세계 각국에서 그리고 각종 국제회의에서 조선 독립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선전하고 청원하고 다녀야 했고, 자치 능력이 없는 망국노(亡國奴)라는 경멸과 매도를 감수해야 했었다. 분단의 원흉(元兇) 스탈린마저도 강조할 만큼, 시급한 건국은 중요했다.

194663일은 운명적인 날이었다. 19459월 이승만은 미국의 시러큐스대학 교수였던 올리버에게 귀하가 대학을 그만두고 우리들의 홍보 업무에 전적으로 매달릴 것을 요청한 바 있다. 올리버는 미국의 연설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훗날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즉석 연설을 준비해 줄 정도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미국에서도 성공적인 이력을 쌓아가던 그가 이승만과의 인연 때문에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면서 한국으로 왔다. 그는 1942년에 이승만을 만난 이래 줄곧 한국 독립을 돕고 있었다. 올리버가 서울에 도착한 날이 공교롭게도 194663일이었다. 그날 정읍에서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폭탄을 던졌고, 서울에서는 미군정 최고 지도자들과 올리버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다음은 올리버의 회고이다.

하지 장군과 그의 차석으로 남조선 군정 장관으로 있던 아처 러치아(Archer Lerch) 장군과의 모임에 불려나갔다. 두 사람은 나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또한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들은 모두 이승만이 과대망상으로 거의 제정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실상 하지 장군은 어떤 정신병 의사가 이 박사와 은밀하게 면담을 가지도록 일을 진행시킨 바도 있다. 그들은 그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매우 유쾌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공식 모임에서는 아주 난폭한 사람이 되어 소련과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일처리를 더욱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이날 하지는 이승만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했다. “이승만 박사는 한국 정치가들 중에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며, 나는 그가 유일한 인물이라고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공산주의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는 한, 그는 한국 정부 내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합니다.”

이승만이 정읍에서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63일에, 하지는 서울에서 정신병자 이승만은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고 극언했다. 두 사람의 정면충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날이다. 하지와 러치가 올리버를 만난 것은 같은 미국인 입장에서 도움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의 오랜 동지인 올리버가 이승만을 설득하여 공산주의자들과 친하게 지내려는 미국의 정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의도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올리버는 그의 평생을 통해서 웬만한 한국인보다도 더 한국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입증해 보였다. 올리버는 하지의 희망과는 달리, 오히려 이승만과 한국의 입장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결국 하지는 올리버를 처형시켜 버려야 한다는 극단적인 발언까지 했다. 우리의 건국 과정에는, 올리버와 같은 고마운 미국인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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