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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건국대통령 이승만 장로 편 - 30여년만의 귀국, 목적은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
[[제1536호]  2017년 1월  28일]

이승만의 환국(還國), 그 우여곡절

당시 미국에서 한국까지는 배로 한 달 정도 걸렸다. 이승만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다. 하지만 그가 귀국한 것은 해방되고 두 달 만이었다. 비행기를 탔는데도. 배타고 오는 것보다 두 배나 시간이 걸렸다. 이승만의 망명 생활이 파란만장했다면, 그의 귀국 과정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승만을 골치 아프게 생각한 미국 국무부가 여권 발급을 거부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이유를 붙여가며 이승만의 귀국을 막으려고 했다. 사실 그네들의 예상은 맞았다. 귀국한 이승만이 계속해서 미국 관료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귀국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낙심에 빠져있을 때, 갑자기 모든 문제가 한 번에 해결되면서 이승만은 귀국길에 올랐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승만의 귀국에는 두 가지 우연이 겹쳤다. 하나는 하지와 윌리엄즈 중령의 만남이다.

194598, 인천에 상륙한 하지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어를 구사하는 윌리엄즈 해군 중령을 우연히 발견했다.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무(全無)했던 그는 반가워하며 그 자리에서 윌리엄즈를 자신의 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윌리엄즈는 서울의 중앙청에서 하지의 업무를 보좌했다. 그는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책상에서 보고서나 만지작거린 것이 아니라, 직접 한국인들을 만나 민심(民心)을 파악하려고 했다. 쌍발 비행기를 타고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남한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한국의 서민들을 상대로 대화를 나누었다.

그 과정에서 윌리엄즈는 한국인들에게 거듭거듭 똑같은 질문을 받아야 했다. “왜 우리 대통령 이승만 박사를 빨리 데려오지 않는가? 이승만 박사가 미국에 있다고 하는데 왜 데려오지 않는가?”라는 물음이었다. 윌리엄즈는 자신이 전해들은 민심을 하지에게 보고했다.

하지는 혼돈 상태의 정국을 수습하기 위해 이승만을 보내줄 것을 맥아더와 미국 정부에 요청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이승만이 임시 정부의 대통령으로 유명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을 떠난 지 삽십여 년이 지난 후였다. 더군다나 나이 칠십 세의 고령이었다. 평균 연령이 사십여 세 전후였던 당시 상황에서 보면, 이승만의 활약상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지도자들은 이승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름 없는 한국인들도 이승만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는 것은 무언가 특이했다. 어떻게 윌리엄즈가 가는 곳마다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보내라고 요청했을까? 여기에 또 하나의 우연이 있다. 그 우연을 만들어낸 세력은 놀랍게도 공산주의자들이었다.

8.15 해방에서 이승만이 귀국하는 1016일까지를 학계(學界)에서는 좌익 득세기라고 부른다. 해방 공간을 주도한 세력이 좌파였기 때문이다. 해방과 함께 온건 좌파 여운형이 주도한 조건 건국 준비위원회(건준)가 발족되었다.

다음날에는 전국 각지의 교도소에서 수천 명의 정치범들이 석방되었다. 풀려난 사국 사범들은 건준의 지방 조직을 차례로 건설해나갔다. 순식간에 건준은 162개의 지부로 확장되었다.

건준이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하던 820, 광주의 벽돌 공장에 숨어있던 인물이 서울로 올라왔다. 훗날 한반도에 파란을 몰고 온 공산주의자 박헌영(朴憲永)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박헌영은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투옥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고 풀려났는데, 석방 사유가 특이하다. 공산당에서 전향을 했거나 혐의가 없어서가 아니라 정신병자라는 이유였다.

박헌영은 몇 달 씩이나 자신의 인분(人糞)을 먹어가며 정신병자 행세를 했다. 혁명 과업을 위해서 인분을, 그것도 몇 달씩이나 먹어낼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다. 박헌영은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 재건 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여운형의 건준에 참가해서 조직을 장악해버린다.

좌우 연합조직에 한 파트너로 참가했다가 결국 조직 전체를 차지하는 전형적인 공산당의 수법을 발휘한 것이다. 박헌영이 장악한 건준은 96일 조선 인민 공화국(인공)을 선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공산당이 선포한 인민 공화국의 주석으로 미국에서 돌아오지도 않은, 돌아오는 것 자체가 불투명한 이승만이 추대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승만을 얼굴 마담으로 이용하려는 공산당의 전술이었다. 이승만과 마찬가지로 그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던 김구를 내무부 장관으로 발표한 것도 같은 술책이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장관에는 국내외의 망명가들을 앞세우고 차관에는 공산주의자들을 포진시켰다.

그럴듯하게 보여서 세력을 확장한 다음 자신들의 뜻대로 정국을 끌고가고자 했다. 앞으로는 얼굴 마담을 앞세우고 뒤에선 실세가 장악하는 것은 그자들의 고전적인 수법이다. 미군정은 당연히 인민공화국을 거부했다. 그것은 해방 정국의 한낱 해프닝으로 끝내버렸다.

인민 공화국에는 이처럼 복잡한 사연이 들어있었다. 하지만 일반 대중이 깊숙한 사연을 알 리가 없었다. 대중은 해방과 독립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일본이 물러갔으니 당연히 우리나라 정부가 세워질 것으로 기대했다.

일반 대중에게는 그때까지 좌익도 없었고 우익도 없었다. 그저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는 뉴스가 보도되니, 그것이 우리나라의 새로운 정부이고 이승만은 새 대통령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승만의 귀국을 재촉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105일 뉴욕 공항에서 출발했다. 프란체스카는 동행하지 못하고 3월 뒤에야 시애틀에서 일본으로 가는 군 수송선을 탈 수 있었다. 공항에는 그녀와 미국인 친구들, 구미위원부 임원들이 나왔다. 역사적인 귀국길에 오르면서 이승만은 말했다. “나 한 사람은 오든지 가든지, 죽든지 살든지 일평생 지켜오는 한 가지 목적으로 끝까지 갈 것이다.” 그 한 가지 목적은 기독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일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당연히 인민 공화국 주석 제의를 거절했다. 6일 뒤인 1021, 그는 올리버에게 편지를 썼다. “가소로운 부분은 공산당이 나를 수반으로 해서 정부를 조직한 일이오. 나는 그들에게 소련이 나를 반공주의자라고 공격하는 마당에 내가 공산당 지도자가 되었으니 큰 영광이라고 말하였소...”

공산주의자들이 가소로움때문에 그는 삽시간에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 환국할 수 있었다. 이승만의 귀국을 가능케 한 두 가지 우연, 하지와 윌리엄즈 만남과 인민공화국 명단 발표는 대로 드라마보다도 재미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보여준다.

더군다나 이승만을 도와준 두 세력, 미군정과 공산당이 이승만으로 인해 숱한 고초를 겪게 되는 훗날의 상황을 고려하면 더욱 흥미롭다.

이호 목사 <신안산대 겸임교수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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