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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 장로8 -‘생지옥’에서 회심하다
[[제1492호]  2016년 2월  6일]

한성감옥은 끔찍했다. 이승만을 면회하러 갔던 미국 선교사 에디(Eddy)의 기록이다.

“그들의 감옥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다. 자백을 받아내거나 남을 연루시키기 위해 자주 고문을 가하고 죄수들을 축사(畜舍)에 가둔 소떼 처럼 이리저리 몰아붙인다. 죄수들은 위생 상태가 형편없고 해충이 우글거리는 흙바닥 위에서 숨막히게 답답한 분위기를 참아가며 잠시도 방을 비우지 못한 채 생활한다. 정치범들은 흉악범, 무뢰한들과 함께 어울려 있다. 답답한 감방안에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재빨리 칼을 쓰고 준비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과 겹쳐 앉지 않는 한, 제대로 앉을 수조차 없다. 그들은 간수들과 동료 잡범들에 의해 잔인하게 취급받는다. 구역질나고 때로는 부패한 급식이지만 약한 자의 몫을 강한 자가 빼앗아 먹는다. 정치범들이 겪는 고문은 죽음의 고통이다. 김 모씨는 고문을 받다가 다리가 부러졌다.”

이승만과 2년 여를 함께 지냈던 감옥 동료 가운데 김형섭(金亨燮)이 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던 사나이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한성 감옥은 감당하기 어려웠다.

“한 칸의 방만한 곳에 50명 정도의 사람들이 ‘진흙 속의 뱀장어’ 같이 벌거벗은 채로 앉아서 잠을 잤다. 감옥 안의 공기는 후덥지근한 데다 체취와 땀 냄새 그리고 대소변의 악취가 지독해 처음으로 감방에 들어가는 사람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문틈 속으로 코를 돌려야 한다. 감옥의 급식 상태는 팥밥과 콩나물, 소금국이 전부인데 음식을 담은 그릇이 불결하여 보기만 해도 먹을 생각이 들지 않는다. 옥리들이 자기들 배를 채우기 위해 나쁜 쌀에다 팥을 섞어 밥을 짓기 때문에 돌이나 겨 껍질 그리고 다른 잡물들이 너무 많이 섞여 있어 감옥에 오래 있으면 누구나 이가 상하고 위를 버리게 된다. 이처럼 조악한 음식이지만 하루 두 끼 밖에 배식을 하지 않는데다 그 양도 적었다. … 해충, 빈대의 공격이 여러 가지 고통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었다. 2~3일이 지나면 빈대가 빨아먹은 피 때문에 옷이 빨갛게 물들어 세탁을 해야만 했다.”

김형섭을 가장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빈대였다. 빈대들은 발끝에서 목까지 온몸에 기어올라, 살갗이 빨갛게 부풀어 오를 때까지 피를 빨았다. 칼을 쓰고 족쇄에 묶인 죄수들에게는 방어할 방법이 없었다.

유영익의 치밀한 연구에 의하면, 한성 감옥에서 죄수 일 인당 차지할 수 있는 면적은 불과 0.23평(0.76제곱미터)이었다. 눕기는커녕 여유 있게 앉기에도 부족한 공간이다. 더군다나 목에 칼을 쓰고 있는 대역 죄인에게는 숨쉬기도 비좁았다. 한성 감옥의 실태는 한마디로 ‘생지옥’이었다.

이승만의 목에는 무게 10킬로그램의 칼이 씌워졌다. 손에는 움직일 수 없도록 수갑이 채워졌다. 발에는 꼼짝 못하도록 족쇄가 물려졌다. 칼을 벗고 손발이 풀리는 시간은 하루 스물네 시간 가운데 단 5분 뿐이었다. 온몸은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감옥에는 바닥조차 없었다. 살인범과 같은 중죄인들은 널빤지도 깔지 않은 흙바닥에 던져졌다.

인간의 곤경은 하나님의 기회이다. 떨치며 일어나 용감하게 자신의 길을 달려갔던 인간은 어쩔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비로소 신(神)을 찾는다.

몸부림쳐도 발버둥 쳐도 안 되는 곳, 몸부림치고 발버둥 칠 힘조차 없는 상황, 그럴만한 물리적인 공간조차 허용되지 않는 한성 감옥에서 이승만은 성경을 찾았다. 성경을 구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나는 그 후 성경을 구하려고 했으나, 옥중에서는 종교서적이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또한 선물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비밀 방법을 통해 셔우드 에디(S. Eddy) 박사가 조그마한 ‘신약성서’를 보내왔는데, 그것을 받은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머리에 칼을 쓰고 손에는 수갑을 차고 있으니 한 장을 읽고 다음 장을 넘길 수가 없다. 누군가 옆에서 넘겨주어야 한다. 동료 죄수들의 도움을 받아가며 성경을 읽는데, 예전과는 새롭게 읽혀졌다.

“나는 감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면 성경을 읽었다. 그런데 배재학당에 다닐 때는 그 책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는데, 이제 그것이 나에게 깊은 관심거리가 되었다. 어느날 나는 학교에서 어느 선교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해주신다고 했던 일이 기억났다.”

성경을 읽다가 설교가 떠오른 결정적인 순간을 이승만은 회고한다.

“내가 품고 있는 질문은 꼭 한 가지, 이제 나는 어디로 가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때 나는 학교 예배실에서 들은 설교를 기억하고 목에 씌운 형틀에 머리를 숙이고 평생 처음으로 기도했다. ‘오 하나님, 나의 영혼을 구해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우리나라를 구해주시옵소서.’ 그랬더니 금방 감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지는 것 같았고 나의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 평안이 깃들면서 나는 완전히 변한 사람이 되었다.”

그날, 완전히 변한 것은 이승만 뿐이 아니었다. 먼저 이 나라의 선교 역사가 바뀌었다. 이승만은 조선의 양반, 왕족, 상류층 출신으로는 국내에서 개종한 첫 번째 개신교 신자였다. 영향력 있는 정치인, 언론인, 연설가들 중에서도 국내파로는 첫 번째였다.

이승만보다 먼저 기독교를 받아들인 양반 지식인으로는 1883년 동경에서 개종한 이수정(李樹廷)과 1885년 샌스란시스코의 서재필, 1887년 상해의 윤치호 등을 손꼽을 수 있다.

국내외를 통틀어 양반 개종자 자체가 몇 사람 안 되었고, 이승만을 제외한 이들은 모두 해외 체류 시절에 기독교인이 되었다. 유교 문화와 전통이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던 조선 분위기에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 첫 스타트를 이승만이 끊었다.

그 영향력은 선교와 종교의 영역에만 머물지 않았다.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요 건국대통령으로 성장해 간 그의 발자취와 함께, 기독교는 이 나라 역사 전체에 깊은 흔적을 남기게 된다.

이호 목사

<신안산대 겸임교수 •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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