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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통령 이승만 장로5 - 일간지 시대를 연 특종기자
[[제1485호]  2015년 12월  12일]

‘협성회회보'도 배재학당과 아펜젤러 학장에게 부담을 주었다. 날카로운 논설이 정부를 자극하여 선교사들은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아펜젤러는 신문의 내용을 부드럽게 할 것을 당부했지만, 열혈 청년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협성회회보'는 협성회와 비슷한 수순을 밟았다. 협성회가 배재학당의 울타리를 벗어나 독립협회로 성장한 것처럼 ‘협성회회보'는 ‘매일신문'으로 발전했다. 여기에서 또 ‘최초'가 등장한다. 1898년 4월 9일에 창간된 ‘매일신문'은 한국 최초의 일간지였다. 주간지가 일간지로 성장해나간 것은 그만큼 반응이 좋았다는 뜻이다. 매일 신문을 발간해도 된다고 판단할 정도로 제작진들은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이승만은 ‘매일신문'의 사장 겸 주필이었다. 이로써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일간 신문 편집자'가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에 일간지 시대를 여는 역사적인 역할을 했다. 이제는 사소해진 것이 역사에서는 중요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요즘에야 날마다 신문이 배달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 당시에는 역사에 기록될만한 새로운 사건이었다.

신문은 시대의 거울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 지식인 윤치호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몇 백 달러나 몇 병의 샴페인 혹은 맥주 몇 병만으로도 일본 사람, 혹은 러시아인, 아니 누구든지 한국 내에서 가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에 대해 이권을 살 수가 있다.”

윤치호의 글은 약간 과장된 것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부패는 심각했다. 정부는 백성들에게는 무자비하면서도 외세에 대해서는 무능력했다. 한반도의 각종 이권은 허술하게 외국으로 넘겨졌다. 우리 땅에 와 있던 외국인들의 행패도 극심했다.

‘매일신문'은 그와 같은 현실을 고발했다. 우리 언론의 역사에 대한 연구자로 손꼽히는 정진석은 “매일신문은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다.

매일신문은 1898년 5월 16일자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가 이권을 요구한 외교 문서를 폭로했다. 러시아는 목포와 진남포 조계지의 사방으로 10리를 차지하려고 했고, 프랑스는 평양의 석탄광을 채굴하여 경의선 철도 부설에 사용하려고 했음을 보도했다.

이 기사는 백성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즉각 독립협회가 들고일어났다. 정부 측에 사실을 밝혀줄 것을 요구했다.

독립협회는 질의서에서 “본국의 땅은 선왕의 강토요, 인민의 생업하는 땅인데 이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알아야겠다”고 항의했다.

매일신문의 보도와 독립협회의 항의로 여론이 들끓자 러시아와 프랑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들은 정부 측에 외교 문서가 유출된 경위를 따지며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했다. 그네들 열강에게 매일신문은 매우 거슬리는 존재였다. 당시의 외국 공관은 정부 대신들보다도 신문을 더 꺼리게 되어 ‘군사 몇 만 명 보다도 더 어렵게' 여길 정도였다.

매일신문은 혁혁한 발자취를 남겼으나 경영상의 문제로 곧 발행을 중단했다. 이승만은 곧이어 1898년 8월 ‘제국신문'을 창간했다.

이로써 이승만은 1898년 한 해 동안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을 모두 창간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한 해 동안 무려 3개의 신문을 창간한 기록은 아마도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다.

제국신문은 조선을 합병한 일제가 모든 한국 신문을 폐지시켰던 1910년 8월까지 12년을 존속했다. 그 시기 대표적인 신문으로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을 들 수 있다. ‘황성신문'은 주로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여 한자와 한글을 겸용했다. ‘제국신문'은 한문을 모르는 상민과 부녀자들을 위하여 한글 전용을 선택했다. 여기에서도 이승만의 대중적인 노선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두 신문의 편집인들이 모두 배재학당과 독립협회에서 서재필의 영향을 받은 이들이라는 점이다. 개화파 지식인들에 대한 서재필의 영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불의한 시절, 정의파 언론인 이승만은 붓의 힘으로 싸웠다. 1898년 8월 30일자 ‘제국신문'에는 기자 이승만의 특종 기사가 실렸다. ‘대한사람 봉변한 사실'이다.

“일인(日人)이 수교에서 배를 사서 껍질을 벗길 새 옆에 앉은 대한 사람 하나가 침을 잘못 밷다 일인의 옷에 떨어진지라. 일인이 … 장동 사는 강흥길을 집탈하여 가지고 배 벗기던 칼로 강가를 찔러 다행히 중초(中焦, 심장에서 배꼽 사이)는 상하지 아니하였으나 바른편 손을 찔러 유혈이 낭자한지라….”

침을 뱉었다고 칼로 찔렀으니 우리나라에 와 있던 일본인들의 행패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그대로 보여준다. 이승만이 비분강개(悲憤慷慨)한 것은 단순히 칼로 찔렀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한국인이 칼에 맞았지만 한국 순검은 수수방관할 뿐이었다. 대조적으로 일본인 순사가 와서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 사람을 자신들의 경찰서로 연행했다.

현장에 있던 군중들은 격분하여 일대 소동이 벌어졌고, “칼질한 놈을 우리가 보는 앞에서 처벌하라”고 요구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기자 이승만은 제국신문 4페이지 가운데 2페이지 반을 할애하여 이 사건을 소상히 보도했다.

“그날 밤에 수백 명이 대한경무처에 가서 들어가 억울하고 원통함을 하소연하려 한즉, 그곳 있는 순검들이 다 살아서 소리도 크게 질러 감히 가까이 오지 말라 하거늘, 백성들이 소리 지르기를 이날 백성이 이 나라 경무청에 와서 호소하려 하는 것을 어디로 가란 말이오….”

우리 백성이 우리 땅에서도 보호받을 수 없었다. 우리의 관리들조차도 칼을 휘두르는 외국인들 앞에서 꼼짝을 못했다. 나라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호 목사 <신안산대 겸임교수•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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