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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 (7)
[[제1613호]  2018년 10월  6일]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

1919 3.1운동이 일어난 뒤 일제가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되자 민족지도자들은 독립을 위해서는 우선 힘을 길러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해 졌다. 그래서 조선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으로 실력양성운동을 벌여 나갔는데, 그중 민립대학설립운동은 1920년에 우리 민족의 힘으로 대학을 설립하려고 한 민족교육운동이다.

1921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유진태, 오세창 등이 조선민립대학 설립 기성준비위원회를 발족하고 전국적으로 발기인 모집에 나섰다. 호응은 예상을 넘어 만주 간도지역과 하와이에서도 지부가 결성되었다. 이후 2년여의 준비 끝에 1923 3 29일 오후 1시 서울 종로구 중앙청년회관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462명의 인사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바로 민립대학 기성회 창립 발기인들이었다.

이들은 취지서에서생존을 유지하며 문화의 창조와 향상을 기도하려면 대학의 설립을 사할 수 없다”고 민립, 오늘날의 사립에 해당 대학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조선 1000만 민중이 1원씩”을 구호로 1년 안에 1,000만원을 모아서 법과, 문과, 경제과, 이과, 공과, 의과, 농과와 기타 학과를 설치하기로 결의하였다.

1922~1924년 동아일보에서는  당시 이 운동의 진행상황이 100여 건의 기사와 사설로 상세히 보도되었다. 창립 발기대회 기사에는 발기인 전체 명단까지 실렸다. 중앙부집행위원 30인으로 이상재, 이승훈, 조만식 등이 선임되었고, 오윤선도 이 운동에 참여하여 후일 육영사업에 가세하는 계기가 된다.

민립대학 설립운동은 민족의 손으로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자는 오랜 염원에서 비롯되었다. 1907년 시작한 국채보상운동이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무의미해지자 민족주의 세력은 당시 모은 자금을 민립대학 설립에 쓰려했으나 일제가 허가하지 않아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23년 총회를 열어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설립계획서를 확정했다. 이 계획에 따라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이에 놀란 일본이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둘렀다. 또한 민립대학설립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이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단 한 개의 민립대학도 설립하지 못했다.

 

평양 숭인상업학교

숭인상업학교의 뿌리는 1894년 마펫 선교사가 설립한 널다리교회가 세운 숭덕학원이고, 1922 4월 숭덕학교는 고등보통과를 숭인학교라는 이름으로 분립하고 5년제 학제로 개편하여 산정현교회 담임목사 강규찬 이름으로 설립허가원을 제출하였다. 그러나 3.1운동의 지도자로 지목받고 있던 강규찬 이름으로 학교 허가를 신청한 것을 총독부가 곱게 볼 리가 없었다. 그래서 총독부는 대표자 강규찬 1인으로는 설립허가를 내 주기가 불충분하고 학교를 운영할 만한 뚜렷한 재산이 없다는 이유로 학교 설립을 불허했다.

그래서 강규찬 목사는 오윤선, 이일영, 정일선, 정두현, 고진한, 윤원상, 박기봉, 박치록, 변인서, 길선주 등과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모임을 갖고 평양의 7개 장로교회에서 1만원씩 회비를 내는 것으로 재정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숭인학교는 국내 유일한 한국교회 운영의 학교이며, 한국인이 경영하는 학교로 경천애인 사상에 근거한 교육정신과 민족주의 배양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일제 치하에서 요시찰 대상의 학교였으며, 그 허가가 용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숭인학교는 오윤선 외 3명의 이름으로 설립허가가 용이한 숭인상업학교로 설립인가를 신청하여 1930 4월 실업학교로 인가를 취득하였다.

숭인상업학교로 인가를 얻기 위해서 오윤선 장로는 1930 1월 도제직회를 소집하고 학교 인가를 얻는 일에 기도를 요청하자 평양 시내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재정적인 문제와 학생들을 추천하는 일에 뜻을 모아 결의를 하였다. 1932년 학교 부지 800평과 학교 운동장 1,800평을 시가 2만원에 매입하였으며, 대강당 겸 예배당으로 2 128, 교사 3층 연화조로 72평을 건축하는 경비 15,000원을 확보하고 건축을 시작하였고, 백선행 여사는 13,000원 상당의 토지를 기부해 재단법인 설립의 기초를 닦게 하였다.

이렇게 숭인상업학교는 평양지역 기독교계 민족지사들인 조만식, 오윤선, 김동원 장로 등이 중심이 되어 평양 경상리에 설립한 학교이다.

공사가 끝나자 학교의 설립자 오윤선 장로는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숭인상업학교는 평양의 자랑이요, 우리 힘의 소산이외다. 이제 우리 숭인상업학교가 우리의 피와 땀으로 이만큼 큰 것에 감개가 깊거니와 앞으로 학교가 더욱 발전하려면 모든 교회 교인들의 절대적인 기도가 필요하거니와 그 기도로 인해 손색없는 학교로 성장하리라 믿고 싶습니다.”

교사들도 쟁쟁하였다. 성경과목은 한경직 목사와 김재준 목사가 맡았으며, 민족의식이 강한 교사들이 학생을 가르쳤다. 실업교육과 민족정신함양이 탁월한 조명식주영력조수증강필상 등 교사들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렇게 학교가 굳건히 세워지기까지 설립자 오윤선 장로의 철저한 민족의식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29 11 3일에 있었던 광주학생항일운동 소식이 1930년 평양까지 전해지자 숭인상업학교 학생들은 비상 학생총회를 소집하고 이 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다. 비상 종소리에 모든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이때 한 학생이 운동장 단상에 올라가약소민족을 해방하라. 피압박 민족을 해방하라.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외치자 학생들은 다 같이 시내로 나가 시가행진을 벌였다. 결국 이 운동은 평양 시내에 있는 모든 학생들을 불러모았고 혹독한 경찰의 탄압 속에서도 며칠간 항일운동이 계속되었다. 이 일로 숭인상업학교 학생 8명이 구속되었다. 오윤선 장로는 구속된 학생들을 매주 면회하고 돌보며 그 학생들을 위해 매일 기도드렸다.

오장은 장로<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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