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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9호]  2018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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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 (6)
[[제1612호]  2018년 9월  22일]


조만식안창호와 물산장려운동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젊은이들이 의지할 곳이 어디 있었을까? 그래서 이들은 종교에 의지하며 그곳에서 동지를 찾고 그들과 뜻을 모아 여러 형태의 항일운동을 도모하게 된다. 그러나 그 당시 독립이 보장된 것도 아니며 암담한 조국의 미래만이 보이는 때, 나라를 사랑한다는 일념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는 것이다. 고향에 돌아온 오윤선은 동생 오형선의 간곡한 부탁으로 교회를 찾던 중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돌리고 거기서 조만식을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둘은 죽음으로 갈라설 때까지 동고동락을 하며, 평양 계리에 있는 오윤선의 집에 조만식은 매일 찾아와 나라와 민족 걱정을 함께 나누며 고뇌하고 민족운동에 호흡을 같이한다. 그래서 산정현교회 근처에 위치한 오윤선의 집은 항일운동의 본거지가 되어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화합하고 기거하였으며, 특히 도산 안창호, 고당 조만식과는 동향인으로 민족운동의 뜻을 함께 하였다.

안창호는 1878년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하였고, 1894년 언더우드 목사가 설립한 민로아학당에 찾아들어 1897년 폐당할 때까지 3년간 산수, 지리, 세계사, 과학 등 새로운 학문을 배웠으며 특히 문학과 음악에 조예가 깊은 민로아 학당장의 소질을 전수받아 미구(未久)에 조리있는 웅변과 문필 그리고 거국가, 애국가 등 많은 작품을 남기게 된다. 이후 독립협회, 신민회, 흥사단 등을 조직해 활발한 구국운동으로 일생을 바쳤다. 1932 4월 홍커우 공원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붙잡혀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35년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한 뒤 오윤선 자택에서 오래 정양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난다.

고당 조만식은 본관이 창녕이며 1883 2 1일 평안남도 강서에서 출생하였다. 1905년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하고 재학 중 이승훈, 안창호 등 선각자의 영향을 받고 기독교에 귀의하고 1908 6월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에서 수학했으며, 그때 간디의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 사상을 배워 독립운동의 거울로 삼았다. 무저항주의와 민족주의에 감명을 받고 평생의 지표로 삼는다. 그는 일제에 불복종하되 무저항주의, 비폭력주의로 대처하며 민족자본육성과 민족교육활동에 힘쓴 인물로조선의 간디'로 불렸다. 그리고 고당의 몸가짐은 우리 동포들과 호흡을 같이하여 일정의 모진 탄압 속에서도 한인들의 소송사건이 일어나면 이는 으레 오윤선 장로댁에서 고당 선생의 명판결을 기다리기 일쑤였다. 우리 민족의 일은 그 수치와 허물을 이 민족에게 안 보이겠다는 고당의 의지 때문이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3.1운동 이후 일제의 탄압은 날로 심해지고 민족정신 말살정책이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나자, 3.1운동에 참가했던 민족지도자들이민족운동의 부흥을 위해서는 우리 힘을 배양하는 것이 절실하다는 것'을 주장하며 벌인 운동이 바로조선물산장려운동’이다.

고당 조만식은 1920 7월 평양에서 김동원 오윤선 등을 비롯하여 그곳 기독교청년회와 함께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물산장려운동을 시작한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김성수와 동아일보의 지지를 받아 1920 12 7일에는 동아일보가 물산장려운동의 전국적 확산을 제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대하여 서울과 지방의 반응이 컸으므로 1923 1 21일 서울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창립하고 전국 각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여 전국적인 물산장려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이 운동은 일제의 탄압과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물론 기독교청년회, 학생들, 일반 시민들과 기생들까지도 동참하는 전국적 운동으로 파급되었다. 이렇게 물산장려운동은 민족기업을 살려 민족 경제 자립을 이루자는 취지의 운동이었다. 일본 상품을 쓰지 말고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경제적 민족 운동으로서,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 이후 두 번째로 일어난 범민족적 경제 살리기 운동이었는데, 1923 1 9 20여 개의 민족단체 대표 160여 명이 서울에 모여 발기준비대회를 가진 데 이어, 2 16일에 3000여 명의 회원들이 참가하여 발족시킨 모임이 이 운동의 중추적인 기구가 되었다.

이때의 기본 실행 요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의복은 남자는 무명베 두루마기를, 여자는 검정 물감을 들인 무명치마를 입는다.

둘째, 설탕-소금-과일-음료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물은 모두 우리의 것을 사 쓴다.

셋째, 일상용품은 우리 토산품을 상용하되 부득이한 경우 외국산품을 사용하더라도 경제적 실용품을 써서 가급적 절약을 한다.

이 세 가지가조선물산장려운동'의 기본정신이었다.

이렇게 평양에서 비롯된 토산품 애용운동은 일제의 탄압에 시달리며 경제적 착취를 당해오던 시민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어, 소비조합을 비롯한 민족기업 등의 설립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인천을 거쳐 서울에서의조선물산장려회'의 창립과 더불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그러나 이 운동은 조선인들로부터 열렬한 호응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1년이 채 안되어 시들해졌는데, 이유는 토산품 가격의 폭등으로 서민들이 손해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무산계습과 관계없는 유산계급을 옹호하는 운동이라고 사회주의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 후 활동 방향을 전환하여 소비조합 조직, 조선물산진열관 설입, 조선물산품평회 등 새로운 사업을 모색하였으나 이 또한 실현하지 못하고 침체되었다. 이러한 조선물산장려회는 조만식 명제세 김성준 등에 의해 10여 년을 활동하다 1934년부터 재정난을 겪기 시작하고, 일제의 탄압과 좌파의 책동으로 인해 1940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비록 이 운동이 중간에 직면한 많은 문제들과 일제의 방해로 인해 멈추게 되었지만, 그들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만은 계속 이어져 왔다.

오장은 장로<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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