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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래교회 출신 서병호 장로
[[제1192호]  2009년 8월  1일]
소래교회는 선교사가 들어오기 전 한국인의 손으로 설립된 자생교회로 유명하다. 소래교회는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에 위치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6·25전으로 파괴되었고 이 지역은 북한 군사기지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찾아갈 수 없는 지역이다.

이러한 지역에 1883년 5월 16일 서상륜과 서경조 형제에 의해 소래교회가 설립되었다. 대구 달성 서씨 문중에서 최초로 예수를 영접했던 사람이 서상륜과 서경조였다. 서상륜과 서경조는 평안도 의주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중국 고려문을 드나들면서 홍삼 장사를 했다. 어느날 갑자기 배가 아파 고통스러워 하던 서상륜은 헌트 의료선교사의 도움으로 낫게 되었다. 서상륜은 그 일을 계기로 예수를 믿게 되었으며, 스코틀랜드 선교사인 로스(J. Ross)로부터 세례를 받고 그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 곧 심양으로 가 로스 선교사를 도우면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번역하는 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처럼 성경을 번역했던 서상륜은 몇 권의 책을 짊어지고 의주로 가던 중 고려문 검문소에서 발각되어 별정소에 얼마간 구류되었다. 다행히 먼 친척인 의주 관리의 도움으로 책을 가슴에 안고 단동에서 배를 타고 의주에 들어오게 되었다.

입국에 성공한 서상륜은 자신의 집에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성경을 읽던 중 관헌에게 발각되어 곧 바로 동생과 함께 외가인 소래로 피신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성경을 들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던 일이 바로 자생적 교회를 설립한 계기가 되었다. 소래교회가 설립되기 전 이미 서울에서 육조판서(六曹判署)의 벼슬을 지내고 낙향했던 광산 김씨들이 그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후손인 김윤방이란 사람이 큰 역할을 하였다. 김윤방의 동생 김윤호(서울여대 초대학장, 고환경 박사의 외조부), 그리고 김순애는 김규식 박사의 부인으로서 일찍이 해서제일학교를 졸업하고 정신여학교를 거쳐 중국 남경대학으로 유학을 갔었다.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는 로스 선교사를 만나기 위해서 선교여행을 떠나면서 소래교회를 방문했다. 마침 출생한 서경조의 자녀 서병호를 안고 세례를 베풀었으며, 이 일로 한국기독교 역사상 최초의 유아세례자는 서병호라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소래교회 교인 6명에게도 세례를 베풀었다.

서경조는 당시 과부와 첫 결혼을 했는데, 서경조의 부인에게는 전 남편 사이에서 출생한 아들이 있었다. 서경조는 그를 자신의 호적에 서광호라는 이름으로 장남으로 입적시키고 서병호는 서경조의 첫 아들이었지만 둘째 아들로 호적에 올렸다. 한편 딸을 낳아 대를 이을 아들이 없던 서상륜이 병호를 양자로 입적하였다.   

소래교회가 서서히 지역에 뿌리를 내리자 교회 사역은 서경조가 맡았으며, 서상륜은 선교사들을 돕는 조사와 권서 일을 하면서 각 지방을 순회하였다. 그는 서울에 오면 무어(모삼열) 선교사를 도와 곤당골교회를 설립하고 또 연동교회를 설립하는 등 바쁜 나날을 보냈다.

소래교회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모여 들자 야학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이 야학당이 해서제일학교로 발전하면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게 되었다. 마침 캐나다 침례교 펜익 선교사가 이곳에서 얼마 동안 머물다가 원산으로 이동을 하였으며, 그 후 1894년 매켄지 선교사가 캐나다 장로교의 자비량 선교사로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 선교사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사람이 서병호였다. 더욱이 서병호는 그 위에 서광호라는 형이 있었지만 매켄지 선교사의 귀여움은 오로지 서병호의 차지였다. 서병호는 매켄지 선교사의 임종을 지켜보았던 사람이었다.   

서병호는 해서제일학교를 졸업하고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경신학당에 입학하였으며, 경신학당을 졸업한 뒤 고향에 와서 한동안 소래교회 일을 도우면서 해서제일학교 교사로, 학감으로 활동하였다. 그 후 안창호의 초청을 받고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에서 봉사를 하다가 언더우드 선교사의 배려로 모교인 경신학당 교사 및 학감으로 봉직을 하였다. 이때부터 새문안교회에 집사로 봉사를 하면서 찬양대는 그의 몫이었다.

그리고 서병호는 1914년 남경 금능대학 철학과에 진학을 하면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규식, 여운형, 선우혁, 신석우, 장덕수 등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활약을 하였다. 또한 상해 임시정부의 의정원 내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독립운동 모금에도 참여하였으며, 간도 훈춘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피해를 당한 유족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1921년에는 남화학원(南華學園)을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상해에 있는 유일한 한국인 학교인 인성학교(人成學校) 이사장으로도 활동을 하였다.  

서경조 목사는 새문안교회에서 은퇴하고 친아들이 머물러 있는 상해로 이사하여 상해 한인교회에 출석하며 아들을 돕다가 상해에서 삶을 마감하였다. 당시 상해 외국인 묘지에 안장하였지만 상해의 개발로 인하여 그의 묘는 지금은 찾을 수 없다.

해방이 되자 서병호는 귀국하여 경신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새문안교회 장로로 취임하였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서울노회 부회장을 맡아 봉사도 하였으며, 1959년 예장이 분열할 때 결사반대를 외치기도 했다.

서경조의 아들인 서광호는 세브란스 의전 2회 졸업생으로 의사로서 활동하였으며, 그 외 후손으로는 새문안교회 시무장로이며 대한성서공회 홍보이사인 서원석 장로, 그의 동생 서경석 목사는 중국에서 노동자로 나와 있는 조선족교회를 설립하여 그 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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